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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한복논란 중국이 한국문화 훔치려는이유? 열등감과 문화혁명

by 자유로운경제 2022. 2. 5.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홍위병들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 : 중국 - 수잔 셔크(p.19~20)




문화혁명의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라하여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타파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냥 역사적인 문화 검열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실행된 대규모 반달리즘(문화유산이나 예수르 공공시설, 자연경관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였을 뿐이다.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라" 문화, 교육, 정치, 가족등 모든것을 파괴하고 수천년간 이어온 중국의 사상인 공자 상도 이때 파괴되었다.

이때 일어난 파괴의 수준은 분서갱유 같은 전승국에 의한 패전국의 "문명 파괴"였다고 보면 된다. 결국에는 정치에 이용되면서 결과를 만들기위한 자기 파괴행위였다.

 

 

문화대혁명으로 가장 피해를 본 분야는 사실상 전통과 문화에 대한 부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중국 내에서의 문화유산 소실과 훼손, 전통문화 단절이 10년동안 매일같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 방화와 약탈, 테러, 철거, 도굴 등으로 사라진 문화재만 추산하면 중국 전역에서 최소 10만여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에서 빠진 무형문화유산과 지방 유림, 도교, 불교, 소수민족 등의 문화까지 추산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 산서성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가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림.
  •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평평해짐.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孔廟)[4]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쿵링이(孔令貽)[5]의 분묘도 파헤쳐짐. 당시 기록이나 회상을 보면 후손들 무덤을 파내서 아직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아 시신의 형체가 있는 멀쩡한 시신들은 나무에 매달았다.
  •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희묘(虞姬廟: 사당)와 우희묘(虞姬墓: 무덤)도 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뿐임.
  • 곽거병의 곽릉(霍陵)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함.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 이화원(頤和園)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됨.
  •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2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 사당)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 곳의 묘우 고적(古蹟)을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부수고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 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를 한 무더기 구해냄.
  •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醫聖祠: 의성을 모신 사당)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 하남성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3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등의 목각본도 불에 탐.
  •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것 때문에 훼손됨.
  • 서성(書聖) 왕희지의 능묘와 20무(畝)[6]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거의 평지화됨. 현재는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만 남아있다.
  • 문성공주(文成公主, 당대의 공주)가 친히 주재한 손첸감포(松贊乾布)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塑像)이 서장[7]자치구 각랍사(覺拉寺)에 있었는데, 훼손됨.
  •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 하남성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跪像),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각(碑刻)까지 모두 없애버림.
  • 항주혁명청년이 악묘(岳廟,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묘도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듦.
  •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짐.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됨.
  • 해남도의 천애해각(天涯海角)에 명나라  해서[8]의 묘가 부서지고, 유골도 파헤쳐짐.
  • 만력제 때의 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 북경성 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 또한 베어버림.
  •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이 집은 3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홍위병이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1권뿐이었는데 4개 구절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시체는 불태움.
  •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기념관이 문혁 때 부서짐.
  • 산동성 관현중학 홍위병들이 교사의 선동 하에, 천고의개(千古義丐) 무훈(武訓)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친 후, 모여서 비판하고 태워 재로 만듦.
  • 장지동(張之洞,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수장(首長)인 장 씨 부부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뜯어먹기도 함.
  • 하남성 안양현의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묘가 파헤쳐짐.
  • 흑룡강성 흑하현에 있던 장군분(將軍墳)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 송나라 때 시인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 청나라 말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우귀사신)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함.
  • 캉유웨이의 묘도 파헤쳐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靑島)시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함.
  •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제스의 옛집과, 장제스의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됨.
  • 양후청 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千佛洞)의 벽화도 파괴됨.
  • 안휘 곽저현 문묘(文廟),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 당대(唐代)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문 곳이 현화산(縣花山)으로, 그의 사후(死後), 제자가 개명하여 포선산이 되었는데, 송(宋) 왕안석(王安石)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지은 후, 포선산은 유명해졌는데, 문혁 때 이를 사구(四舊)라 하여,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2개의 탑이 모두 훼손됨.
  •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100여 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됨.
  • 천년 넘게 자금성의 외성 역할을 해준 베이징 성곽[9]을 3년만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현재 그 성곽 터에는 3환로가 깔리고 30년 이상이 지난 뒤에 그 밑에는 베이징 지하철 10호선이 지어졌다.
  • 자금성의 황성과 내성, 그리고 외성을 5년 만에 전부 헐어버렸다. 현재 2환로가 내성과 외성 자리에 있고[10], 내성이 있던 자리에는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이 정확히 똑같은 선형으로 지어졌다.
  • 송나라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썼고, 비석에 새겨져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
  • 만력제의 묘인 정릉을 점령하고 부장품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후 만력제와 황후들의 시신을 끌어내어 "봉건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회부해 투석형에 처해 개박살내고, 남은 잔해는 모조리 불태워서 빗물에 흘려보냈다. 만력제의 시신은 현재 머리카락 일부와 사진 자료만 남아있다.
  •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가 있었는데 천여년전 요나라 때에도 있었던 18나한상과 2천여년전 인도 고승이 갖고 온 패엽경과 옥마를 네 가지 구습으로 몰아 산산조각 파괴하고 부수고 불태움.



너무나 많아서 나무위키에서 가져왔다.
문화혁명의 악영향이다.
위내용은 문화재의 일부분이고, 정치 사회, 종교, 식문화,등 일상의 광범위하게 있던 모든것이 파괴되었다고 보면됩니다.
지금의 중국과 60년 이전의 중국은 다른 나라라고 보면된다.

마오가 말살한 중국에 시진핑이 양념을 치면서,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하드웨어적으로 위성도 발사하는 강국이 되었지만, 소프트웨어의 부실을 되될려보니 부끄럽고 창피하니, 남의것을 훔쳐가는 짖을 하는것이다.
아직도 대국이라는 이름과 조공무역의 역사를 되네이면서, 한국을 조선인줄 아는 사람들이다. 중국이 사람들이 많다보니, 이런애들이 한가득이다.

대국이라는 말을 쓰는 자체가 아직도 명나라에 머물고있는것이다.


그 뒤에는 21세기 홍위병 시진핑 키즈가 함께하고있다. 조심해야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32509320003575?did=GO

 

중국 문화공정 뒤엔 21세기 홍위병 '시진핑 키즈'들이 있었다

"문화도둑, 한국!" 김치와 한복, 판소리, 온돌까지 한국의 전통을 중국의 고유문화라 윽박지르는 중국 네티즌들의 억지와 행패는 30년 전부터 있었다. 중국의 소수민족을 연구해온 인류학자 김인

ww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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